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희생자 수 ===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6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건 아니다. 나치의 주요 절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포함 6군데[*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Treblinka),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베우제츠]](Bełżec),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Chełmno),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소비보르]](Sobibór),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마이다네크]](Majdanek). 이 중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악명높던 곳으로 70만 ~ 90만명이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를 제외한 이들 다섯 수용소에서 약 200만명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들은 모두 폴란드에 있었고, 이들 6군데 외에 벨라루스에 '''트로스테네츠'''(Trostenets)라는 소규모 절멸 수용소가 있었다.]로 알려져 있고 이들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310만에서 350만 정도로 집계된다. 600만의 유대인 사망자 중 나머지는 절멸 수용소가 아닌 기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거나[* 다하우, 작센하우젠 수용소 등.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프와쇼프 수용소도 노동 수용소로 두 수용소와 성격이 비슷하다. 강제/노동 수용소는 수만명의 제소자들을 수용하고 있어야 했기에 건물이 많았고 부지의 규모가 컸다. 참고로 강제 수용소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의 사망률은 수용소에 따라 15%(작센하우젠)~59%(슈투트호프) 정도였다. 다른 악명높은 강제 수용소들을 살펴보면 다하우는 약 20%, 부헨발트 24%, 그로스-로젠 32%, 베르겐-벨젠 42%였다. 이것은 해당 수용소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만 집계한 것으로, 수감자들 중 유대인은 수시로 강제 수용소에서 절멸 수용소로(주로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된 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게토에서의 기아 사망과 학살, 아인자츠그루펜 등이 저지른 집단학살[* 소련, 리투아니아 등 폴란드 동쪽의 유대인 희생자 상당수는 SS나 국방군에게 총살당한 사람들이었다.]로 희생당한 것으로 본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했는데 이때 집계된 시신이 17만 구였다. 그나마 남은 나치의 기록상 아우슈비츠 수용자는 20만이지만 그보단 더 많은 수용자가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희생자 수는 불확실한데,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처음엔 200만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100만명으로 수정 집계 했으며, 전쟁 후 소련은 300만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이것은 과장이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2005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은 최대 130만 명 정도가 수용되어 그중 11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이것은 현재 희생자 수로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수치이다. 이렇게 인원에 대해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것은 이 수용소의 수용 구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자 등록 이전에 분류하는 과정에서 수십 %는 반드시 죽었고, 가끔은 기차역에 도착한 인원 전부를 학살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학살당한 인원은 애초에 집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치가 부여한 식별번호의 숫자로 수용인원이나 희생자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울 듯하며, 모든 인원이 번호를 받았을거라는 보장도 없기에 수용한 인원 파악은 더더욱 어렵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편차가 나오는 실정인데, 공식적인 사망자 수치인 110만명을 넘어 희생자가 15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